국어/문학-현대시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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김광규-대장간의 유혹국어/문학-현대시 2020. 2. 1. 22:33
제 손으로 만들지 않아 한꺼번에 싸게 사서 마구 쓰다가 망가지면 내다버리는 플라스틱 물건처럼 느껴질 때 나는 당장 버스에서 뛰어내리고 싶다 현대 아파트가 들어서며 홍은동 사거리에서 사라진 털보네 대장간을 찾아가고 싶다 풀무질로 이글거리는 불 속에 시우쇠*처럼 나를 달구고 모루*위에서 벼리고 숫돌에 갈아 시퍼런 무쇠낫으로 바꾸고 싶다 땀 흘리며 두들겨 하나씩 만들어 낸 꼬부랑 호미가 되어 소나무 자루에서 송진을 흘리면서 대장간 벽에 걸리고 싶다 *시우쇠: 무쇠를 불에 달구어 단단하게 만든 쇠붙이. * 모루: 대장간에서 불에 달군 쇠를 올려놓고 두드릴 때 받침으로 쓰는 쇳덩이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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오세영-너의 목소리국어/문학-현대시 2020. 2. 1. 22:30
너를 꿈꾼 밤 문득 인기척에 잠이 깨었다. 문턱에 귀 대고 엿들을 땐 거기 아무도 없었는데 베개 고쳐 누우면 지척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. 나뭇가지 스치는 소매깃 소리. 아아, 네가 왔구나. 산 넘고 물 건너 누런 해 지지 않는 서역(西域) 땅에서 나직이 신발을 끌고 와 다정하게 부르는 너의 목소리, 오냐, 오냐, 안쓰런 마음은 만 리 길인데 황망히 문을 열고 뛰쳐나가면 밖엔 하염없이 내리는 가랑비 소리, 후두둑, 댓잎 끝에 방울지는 봄비 소리. *‘하염없이 내리는 가랑비 소리'는 하강의 이미지를 통해 만남이 무산된 화자의 좌절감과 조응한다고 볼 수 있겠군.(0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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김현승-지각국어/문학-현대시 2020. 2. 1. 16:03
내게 행복이 온다면 / 나는 그에게 감사하고, 내게 불행이 와도 / 나는 또 그에게 감사한다. 한 번은 밖에서 오고 한 번은 안에서 오는 행복이다. 우리의 행복의 문은 / 밖에서도 열리지만 안에서도 열리게 되어 있다. 내가 행복할 때 나는 오늘의 햇빛을 따스히 사랑하고 내가 불행할 때 / 나는 내일의 별들을 사랑한다. 이와 같이 내 생명의 숨결은 / 밖에서도 들이쉬고 안에서도 내어쉬게 되어 있다. 이와 같이 내 생명의 바다는 / 밀물이 되기도 하고 썰물이 되기도 하면서 / 끊임없이 끊임없이 출렁거린다! * 불행한 일을 겪지 않기 위해서 항상 대비하려는 의지가 드러나 있어(X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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곽재구-사평역에서국어/문학-현대시 2020. 1. 28. 16:04
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(쓸쓸한 분위기)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(포근.아늑함) 흰 보라 수수꽃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(따뜻한 인간애에서 비롯되는 화자의 행위) -O: 과거의 순간들 -R: 그리움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(체념의 정서)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 화음에 귀.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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강은교-우리가 물이 되어국어/문학-현대시 2020. 1. 28. 15:45
우리가 물(생명력)이 되어 만난다면(가정법)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(성찰)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,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(이상, 소망)에 닿는다면 그러나(시상반전!) 지금 우리는 불(죽음, 소멸의 이미지)로 만나려 한다.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(정서적 거리감, 그대와 물로 만나는 것이 쉽지 않음) 기다리는 그대여(화합의 대상)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(청유형)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(정화된)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(명령형) *상징적, 의지적 *.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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최두석-성에꽃국어/문학-현대시 2020. 1. 14. 01:53
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어제 이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김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낸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자리를 옮겨 다니며 보고 다시 꽃이파리 하나, 섬세하고도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 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낸 정열의 숨결이던가 일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 성에꽃 한 잎 지우고 이마를 대고 본다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여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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김춘수-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국어/문학-현대시 2020. 1. 6. 11:34
샤갈의 마을에는 삼월에 눈이 온다.(시간)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이 바르르 떤다.(희망, 소망적 +상황)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. 삼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 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. *자연물을 살아있는 대상으로 묘사하여 화자가 느끼는 이국적인 세계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(0)