국어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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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육사-황혼국어/문학-현대시 2020. 2. 8. 01:12
내 골방의 커튼을 걷고 /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같이도 /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,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.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 보련다. 그리고 네 품 안에 안긴 모든 것에게 /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 다오. 저 십이 성좌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, / 종소리 저문 삼림 속 그윽한 수녀들에게도, 시멘트 장판 위 그 많은 수인(囚人)들에게도, / 의지가지없는 그들의 심장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. 고비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 탄 행상대에게나, 아프리카 녹음 속 활 쏘는 토인들에게라도, 황혼아, 네 부드러운 품 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의 반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 다오. 내 오월의 골방이 아늑도 하니 / 황혼아, 내일도 또 저 푸른 커튼을 걷게.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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문정희-율포의 기억국어/문학-현대시 2020. 2. 6. 11:56
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소금기 많은 푸른 물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바다가 뿌리 뽑혀 밀려 나간 후 꿈틀거리는 ㉠검은 뻘밭 때문이었다 뻘밭에 위험을 무릅쓰고 퍼덕거리는 것들 숨 쉬고 사는 것들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먹이를 건지기 위해서는 / 사람들은 왜 무릎을 꺾는 것일까 깊게 허리를 굽혀야만 할까 / 생명이 사는 곳은 왜 저토록 쓸쓸한 맨살일까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저 무위(無爲)한 해조음을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물 위에 집을 짓는 새들과 각혈하듯 노을을 내뿜는 포구를 배경으로 성자처럼 뻘밭에 고개를 숙이고 먹이를 건지는 / 슬프고 경건한 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를 참고할 때, ㉠의 함축적 의미와 가장 유사한 것은? ‘검다’는 대개 ‘어둠, 죽음.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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김기림-추억국어/문학-현대시 2020. 2. 5. 17:02
종다리 뜨는 아침 언덕 우에 구름을 쫓아 달리던 너와 나는 그날 꿈 많은 소년이었다. 제비 같은 이야기는 바다 건너로만 날리었고 가벼운 날개 밑에 머-ㄹ리 수평선이 층계처럼 낮더라. 자주 투기는 팔매는 바다의 가슴에 화살처럼 박히고 지칠 줄 모르는 마음은 단애(斷崖)의 허리에 게으른 갈매기 울음소리를 비웃었다. 오늘 얼음처럼 싸늘한 노을이 뜨는 바다의 언덕을 오르는 두 놈의 봉해진 입술에는 바다 건너 이야기가 없고. 곰팽이처럼 얼룩진 수염이 코밑에 미운 너와 나는 또다시 가슴이 둥근 소년일 수 없고나. *과거와 대비되는 현재의 모습을 통해 화자의 단절감이 드러나 있다.(0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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기형도-엄마 걱정국어/문학-현대시 2020. 2. 3. 14:28
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,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,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,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/ 빈 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/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, 내 유년의 윗목* -‘삼십 단’은 어머니의 삶의 무게가 부각되는 효과를 주는 것 같습니다.(0) -‘천천히’는 애써 외로움을 의식하지 않으려는 화자의 심리를 잘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.(0) -‘타박타박’은 힘겨운 삶에 지쳐 있는 엄마의 고단한 모습을 잘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.(0) -‘고요히’는 ‘빗소리’에 위안을 받으면서 화자의 무서움이 완화되고 있는 상황을 잘 나타내는 것 같습니.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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정지용-석류국어/문학-현대시 2020. 2. 3. 14:21
장미꽃처럼 곱게 피어가는 화로에 숯불, 입춘 때 밤은 마른 풀 사르는 냄새가 난다. 한겨울 지난 석류 열매를 쪼개어 홍보석 같은 알을 한 알 두 알 맛보노니, 투명한 옛 생각, 새론 시름의 무지개여, 금붕어처럼 어린 여릿여릿한 느낌이여. 이 열매는 지난해 시월 상달, 우리 둘의 조그만한 이야기가 비롯될 때 익은 것이어니. 작은 아씨야, 가녀린 동무야, 남몰래 깃들인 네 가슴에 졸음 조는 옥토끼가 한 쌍. 옛 못 속에 헤엄치는 흰 고기의 손가락, 손가락, 외롭게 가볍게 스스로 떠는 은(銀)실, 은(銀)실, 아아 석류알을 알알이 비추어 보며 신라 천 년의 푸른 하늘을 꿈꾸노니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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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준관-구부러진 길국어/문학-현대시 2020. 2. 3. 14:17
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.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.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.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.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.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.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.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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곽재구-새벽 편지국어/문학-현대시 2020. 2. 2. 01:50
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의 정령들은 잠들고 눈시울이 붉어진 인간의 혼들만 깜박이는 아무도 모르는 고요한 그 시각에 아름다움은 새벽의 창을 열고 우리들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과 만난다 다시 고통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해야겠다 이제 밝아 올 아침의 자유로운 새소리를 듣기 위하여 따스한 햇살과 바람과 라일락 꽃향기를 맡기 위하여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 새벽 편지를 쓰기 위하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.